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라위 왕조 (문단 편집) === 안정의 회복 === [[파일:모로코 에사우이라.jpg|width=760]] 무함마드 3세가 건설한 유럽식 항구 도시 [[에사우이라]] 마라케쉬 총독을 거쳐 1757년 즉위한 무함마드 3세는 조부 이스마일에 버금가는 33년에 달하는 치세동안 모로코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내전기 동안 약화된 아비드 병사들은 상당수가 퇴역하여 일반인이 되었고, 무함마드는 남은 이들을 정예 부대로 편성하였다. 다만 압둘라를 도우며 영향력을 키운 우다야 베두인들이 페스에서 소동을 일으키자 1760년 무함마드는 군대를 이끌고 페스에 진입, 우다야 지도부를 체포하고 병사들 다수를 살해하며 조직을 해체하였다. 이후 그는 소규모의 우다야 부대를 편성하여 메크네스에 주둔시켰다. 한편 대외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던 무함마드는 포르투갈령이었다가 1541년 버려진 후 작은 항구로 전락해 있던 모가도르를, 영국 출신 건축가 아흐메드 엘 인글리지를 고용해 유럽 상인들을 위한 국제 교역항이자 마라케쉬의 외항 [[에사우이라]]로 변모시켰다. (1764년) 그는 세금을 낮추는 대신 무역을 통해 차익을 매우고자 하였다. 또한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된 [[카사블랑카]] (안파)에서 포르투갈인들이 떠나자 재건에 나서 현존하는 메디나 (구시가지)를 건설하였다. ||[[파일:모로코 미국.jpg|width=350]]||[[파일:모로코 미국 1.jpg|width=337]]|| |||| 1787년 7월 18일 비준된 미국-모로코 우호 조약. 미국 정부가 구성 (1789년) 되기도 전에 체결되었고, [br] 1786년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이 대표로 서명하였다.[*아랍어 원문 الحمد لله هذا تقييد شروط الصلح التي جعلناها مع الماركانوس وأثبتناها في هذا الدفتر ووضعنا عليها طابعنا لتبقى مستمرة إن شاء الله وكتبت بحضرة مراكش في الخامسة والعشرين من شعبان المبارك عام مائتين وألف] |||| 1769년 포르투갈은 주민들을 브라질 남부로 이주시키며 모로코에서의 마지막 거점 마자간 (엘자디다)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1415년 세우타 점령 후 3세기 넘게 계속된 포르투갈의 모로코 간섭 역시 종료되었고, 양국은 비로소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외세가 장악한 모로코 해안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스페인령 세우타와 멜리야만이 남았다. 이마저 일소하기 위해 무함마드는 1774-75년 4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스페인령 멜리야를 포위하나 약속되었던 영국 측의 원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실패로 귀결되었다. 1777년 12월 20일 무함마드는 모로코의 항구에서 교역할 수 있는 국가 목록에 미국을 포함시켰다. 독립을 선언한지 불과 1년 후였고, 비록 직전의 [[새러토가 전투]]가 있었다고 하나 미국의 존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세계 최초로 미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양국은 1787년 미국-모로코 우호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1775년에 그는 우다야에 이어 아비드 부대 역시 견제, 수도 메크네스에서 북쪽 탕헤르로 이동시키며 권력에 거리를 두게 하였다. 이에 아비드는 반발하며 무함마드의 아들 야지드를 술탄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야지드가 마음을 바꿔 부왕과 화해하며 반란은 졸속히 끝났고, 아비드 부대는 여러 소부대로 나뉘어 탕헤르 / 라라셰 / 라바트 / 마라케쉬 / 수스 등지에 분산 배치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1782년까지 소요를 벌였고, 1776-82년의 가뭄과 흉작, 1779-80년의 역병이 겹치며 모로코는 7년간 재난을 겪었다. 이에 무함마드는 밀을 수입하고 세금을 인하했으며 식량과 돈을 풀어 구휼에 나서 피해를 완화하였다. 치세 말기의 무함마드는 앞서 언급된 미국과의 우호 조약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790년 4월 그가 사망하자 계승한 아들 물라이 야지드는 부왕의 개항 정책을 뒤엎으며 유럽과의 조정자 역할을 하던 유대 공동체를 탄압하였다. 1792년 세우타 공격에 나선 야지드가 부상을 입고 사망하자, 동생 술레이만 (슬리마니)이 다른 두 동생인 북쪽의 마슬라마와 마라케쉬의 히샴을 꺽고 계승하였다. 술레이만 역시 쇄국 정책에 나서 유럽과의 교역을 거의 중단시켰으나 야지드처럼 잔혹하지는 않았다. 한편 당시 유럽과 지중해를 뒤덮던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에 중립을 유지할 것을 강권하였고, 술레이만의 쇄국 정책은 이와 같은 기류와 함께 유지되었다. 다만 그 역시 미국에 대해서는 탕헤르에 2층 석조 건물을 하사하는 등 우호를 이어갔다. 이는 미국이 국외에 처음으로 얻은 재산이었고, 향후 140년간 영사관으로 기능하였다. 1811년 이후 술레이만은 와하비 근본주의를 지지하며 수피 종단들을 억누르려 하였는데, 당시 모로코에서 수피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술레이만 본인 역시 그중 하나인 티자니야 종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30년간 통치한 술레이만은 1822년 11월 사망하였고 조카 압둘 라흐만 벤 히샴이 계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